이은호의 블로그

물 먹는 양까지 메모... '갓생러'들이 이렇게까지 쓰는 이유

자료 핵심: 저널링의 재유행(갓생·자기관리·아날로그 물성·자기객관화)

사람들은 무엇에 빠지고, 왜 그것에 열광하는 걸까요? 선택에는 늘 이유가 있습니다. SNS에서 화제가 되는 아이템부터 대중의 소비와 행동까지, 눈에 보이는 유행의 장면을 따라가며 그 너머의 이유와 배경을 들여다봅니다

▲다시 쓰는 삶으로 돌아오는 이유 ⓒ Pixabay(Pexels) 관련사진보기

스마트폰이 일상을 파고들며 기록의 무대가 작은 화면 안으로 옮겨갔을 때, 어떤 이들은 종이로 된 다이어리의 퇴장을 점치기도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입력하고 지울 수 있는 디지털의 효율성 앞에서,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일은 번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기록은 생활의 중심에서 밀려나, 기술이 대체한 아날로그의 흔적으로 남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록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SNS를 보다 보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장면을 쉽게 마주하게 됩니다.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는 물론이고, 노트의 종류와 펜의 사용감, 필체에 이르기까지—쓰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요소가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제 기록은 '저널링(journaling)'이라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디지털 기기가 생활을 완벽히 보조하는 지금,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손으로 받아 적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다시 '쓰는 삶'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요?

나를 최적화하는 '퍼스널 데이터 리포트'

기록의 쓰임새는 목적에 따라 정교하게 나뉘며, 다양한 형식으로 세분화되었습니다. 간단한 기호로 표시하는 '불렛저널(bullet journal)'은 할 일과 일정을 한눈에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써 내려가는 '모닝페이지'는 머릿속을 비워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끌어내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한 일을 기록하는 '감사일기'는 시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수면 시간과 물 섭취량, 운동량 등을 수치로 남기는 '해빗 트래커(habit tracker)'는 좋은 습관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이쯤되면 기록은 일기나 메모의 범주를 넘어, 개개인을 위한 '퍼스널 데이터 리포트'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쌓인 정보를 바탕으로 최적화된 '자기 관리 루틴'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러한 변화는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번진 자기 계발, 일명 '갓생(부지런하고 모범적인 삶)' 열풍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운동이나 독서와 마찬가지로, 저널링 역시 삶의 질을 높이고 스스로를 주도적으로 돌보는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SNS 속 다양한 저널링 방식 ⓒ 유튜브갈무리 관련사진보기

쓰는 행위의 물성 - 아날로그라는 안전장치

저널링 문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손으로 쓰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갑니다. 입력과 수정, 삭제까지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기록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키보드의 매끄러운 속도 대신 펜 끝의 저항감을 느끼며 직접 적는 수고로움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손으로 쓰는 행위는 느립니다.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생각해야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데에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조금 더 천천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느린 속도가 오히려 휘발되는 생각과 흩어지는 감정을 붙잡아 두는 제동장치로 작동합니다.

속도가 경쟁력이 된 세상, 쓰는 행위는 삶의 주도권을 자기만의 속도로 가져오기 위한 작은 저항이 됩니다. 어쩌면 이 느린 호흡이야말로, 우리가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속도인지도 모릅니다.

기록이 불러온 또 다른 나, '무표정의 관찰자'

생각은 의외로 객관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상황에 맞춰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하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같은 일에 전혀 다른 의미를 덧씌우기도 합니다. 실제로 기록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내가 믿고 있던 생각과 꺼내 놓은 문장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널링을 주제로 한 유튜브 채널 '진지우기'의 운영자이자, 기록을 꾸준히 실천해 온 전지욱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보면 생각과 현실은 생각보다 오차가 심합니다. 나는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꺼내보니 비겁했거나,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이기적이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는 글로 적는다고 해서 언제나 더 솔직해지는 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그럼에도 기록이 필요한 이유는 그 과정에서 '생각하는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시선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무표정의 관찰자'라고 표현합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 우리는 생각을 붙잡아 바라볼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합니다. 문장으로 적어 내려가는 순간, 상황은 달라집니다. 막연했던 감정은 형태를 갖추고, 뒤엉켜 있던 생각은 정리됩니다. 나를 둘러싼 상황을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그 거리에서 객관적인 시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시선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지금의 나를 이해하게 됩니다.

▲기록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 진지우기 ⓒ 유튜브 채널 진지우기 (전지욱) 관련사진보기

나의 서사를 집필해 나가는 여정

시간이 흐르며 쌓인 기록들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을 넘어 하나의 '데이터'이자 '역사'가 됩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이어지면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반복해 왔는지 조금씩 드러납니다. 어제 쓴 고민이 오늘 해결되었음을 확인하고, 작년의 내가 가졌던 열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 흐름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비슷한 고민 앞에서 잠시 멈춰 보게 되고, 익숙한 방법 대신 다른 방향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선택들이 쌓이며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갑니다. 한 권의 노트를 채워가는 과정은 나라는 사람의 유일무이한 서사를 집필해 나가는 여정과 다름없습니다.

기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멋진 문장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치장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오늘 느낀 감정 한 토막, 한순간 떠오른 아이디어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완성도가 아니라 '쓰는 행위', 그 자체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속도에 등 떠밀려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면, 잠시 멈춰 펜을 들어보길 권합니다. 흰 종이 위로 사각거리는 펜촉의 질감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서 가장 정직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펼친 노트의 첫 줄이, 우리가 꿈꾸는 내일의 첫 장면이 될지도 모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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